지운은 진달래를 캐서 몇 년에 걸쳐 우편으로 울릉도에 보내고, 종달새를 키워서 새장에 넣어 울릉도를 방문해서 공중으로 날렸다. 그러나 이제는 진달래를 보내기도 어렵고 종달새를 가지고 울릉도에 가야지 하는 것은 마음 뿐이다. “진달래 캐러 입산(入山)을 못합니다.”(1984.5.15.)라고 했다. 92세 노인은 병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서 산에 올라야 진달래를 캘 수 있는데 산 가까이도 갈 수 없다는 슬픈 고백이다.

지운의 울릉도 방문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신문 기사에 ‘시집 보낸 종달새는 잘 사는지’라는 기사가 소개되었다(『한국일보』,1976.5.4.). 기사에 따르면, 여행을 즐기는 지운이 1972년 봄 울릉도를 돌아보고 이곳에 진달래와 종달새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남아 있는 편지를 살피면, 1972년 보다 빠르게 인연은 시작되었다. 우산국민학교의 장창석 교장이 1969년 말에 연하 엽서를 지운에게 보낸 것을 보면 그 이전에 교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70년 여름에 울릉도를 다녀간 후 울릉도의 몇 학교에 우편으로 진달래를 보낸 것에 감사하다는 편지를 받는다(송의남 교장 편지, 1970.12.1.). 1972년에도 지운이 보낸 진달래 한 상자를 잘 받았다는 편지가 남아 있다(오현수 교장 편지, 1972.12.28.).

60년대부터 지운이 울릉도 여행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이때 동행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부안 출신 신조영은 지운과 함께 전국의 유명한 산을 등산하였다. 1966년에는 경북 포항에서 출항하는 배를 타고 지운과 함께 울릉도 여행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신조영, 『찔레꽃 덤불』, 신아출판사, 2018, 89쪽.). 지운은 젊은이 못지않게 빠르게 성인봉까지 등산했고 이때 울릉도에 종달새와 진달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다음에 다시 울릉도를 찾아 국민학교에 진달래를 기증하는 열성도 보였다.

기록으로 보면 지운의 두 번째 울릉도 방문을 1970년으로 볼 수 있는데, 그해에 진달래를 보내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진달래를 보내고 종달새를 울릉도에 가지고 간 이유는 무엇일까?

 

독도와 울릉도에 종달새와 진달래가 없다고 그러데. 그래서 일본 놈들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하잖어. 독도에 가까운 울릉도를 갈 때 종달새와 진달래를 갖고 가서 국민학교에 진달래를 심은 적이 있었네.

 

위 내용은 지운이 김명환과 대화에서 남긴 이야기다. 우리나라 지천에 있는 꽃과 새가 독도에 없어서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은유적 표현이다. 해방이 됐는데도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계속되고 친일파 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에둘러 얘기한 것일 수 있다. 지운 자신이 독도에 진달래를 심고 종달새가 살도록 하고 싶었다. 진달래와 종달새를 독도에 가지고 가려 했으나 가는 길이 막히자 울릉도에서 종달새를 공중에 날리고 이일선 의사가 운영하는 울릉병원 마당에 진달래를 심기도 했다. 어느 때는 가지고 가던 종달새가 포항에서 울릉도를 향하는 배 안에서 죽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진달래와 종달새는 선생이 좋아하는 꽃과 새다. 진달래는 그렇게 화려하지도 향기롭지도 않으며 고산에서 야산에 이르기까지 전국 어느 곳에나 널리 피어 있고 그 청아한 미가 한국적이다. 종달새는 노고지리 또는 종다리라 부르고 운작(雲雀) 등의 이름으로 알려졌다. 곡예를 하듯 하늘 높이 구름에 묻혔다가 땅에 떨어지듯 수직으로 내려앉는 묘기와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새다. 지운은 우리나라 전국 산천에 진달래가 피고 종달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