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鐵洙關係事件豫審決定書全文

(김철수관계사건예심결정서전문)

동아일보 1931.02.05 기사

 

<원문>

 

豫審終結決定 

本籍: 全羅北道 扶安郡 白山面 元川里 百二十八番地 住居: 不定 無職 初臺事 金鐵洙 三十九年

 

本籍: 忠淸北道 忠州郡 忠州面 錦町 百五番地 住居: 京城府 中林洞 三百二十八番地 朴鍾麟方 店員 朝鮮金融組合聯合會今官事 趙金用 三十二年

 

本籍: 全羅北道 金堤郡 金堤面 新豊里 四百二十一番地 住居: 不定 無職 金炳琡 三十九年

 

本籍: 京城府 水標町 四十三番地 住居: 同府 社稷洞 二百四十五番地 無職 金吉得 三十二年

 

本籍: 咸鏡南道 咸興郡 川西面 八里 六十五番地 住居: 同上 敎員 金濟鳳 三十五年

 

本籍: 京城府 桂洞 九十一番地 住居: 同府 西大門町 一丁目 六十一番地 三 無職 金暹事 金壽男 二十五年

 

本籍: 京城府 新洞 三番地 住居: 同上 古物商 金連培 當 二十四年

 

本籍: 京城府 淸雲洞 九十八番地 住居: 同府 同洞 百三十番地 無職 張壽事 張奎晶 二十七年

 

本籍: 京城府 仁寺洞 一丁目 三番地 住居: 同上 印刷工 金完植 二十九年

 

本籍: 京畿道 楊平郡 葛山面 梧濱里 住居: 京城府 武橋町 四番地 新聞記者 朴漢卿事 朴奉吉景 二十九年

 

本籍: 咸鏡北道 鍾城郡 鍾城面 潼關洞 水南里 住居: 京畿道 高陽郡 龍江面 大峴里

無職 朴成春事 朱靑松 二十八年

 

本籍: 平安北道 新義州府 眞砂町 七丁目 二十三番地 住居: 同道 新義州府 雲井町 二丁目 農業 高俊事 安秉珍 三十年

 

本籍: 平安北道 新義州府 梅枝町 六番地 住居: 同道 同府 初音町 十四番地 荷車組合勤務係 高漢秀事 高成昌 三十二年

 

本籍: 慶尚北道 安東郡 豊西面 佳谷里 四百二十二番地 住居: 京城府 桃花洞 八十五番地 無職 權五稷 二十六年

 

本籍: 慶尙北道 安東郡 豊山面 麻厓洞 二百四十一番地 住居: 慶尙南道 釜山府 草梁町 二番地 紡績職工 李永祚 二十五年

 

本籍: 慶尙北道 醴泉郡 普門面 眉湖洞 二百十四番地 住居: 平安南道 平壤府 箕林里 百四十七番地 十三 靴下製造職工 金應基 三十二年

 

本籍: 咸鏡北道 穩城郡 穩城面 周原洞 五百三十七番地 住居: 京畿道 仁川府 松峴里 五十六番地 無職 朴知成 朴志成事 朴長松 二十九年

 

本籍 咸鏡北道 洪原郡 甫靑面 豊東里 百三十五番地 京城府 堅志洞 八十番地 -五 書籍商 蔡奎恒 三十五年

 

本籍: 忠淸南道 扶餘郡 石城面 石城里 五百三十二番地 住居: 京城府 桃花洞 八十五番地 無職 高明子事 高四察 二十六年

 

본적: 咸鏡北道 鏡城郡 龍城面 輸城洞 二百二十九番地 住居: 不定 無職 金衡寬事, 金鶴 三十一年

 

本籍: 咸鏡南道 咸興郡 咸興面 荷西里 七十三番地 住居: 同道 同郡 同面 同里 六十九番地 土地仲介業 李增林 四十四年

 

本籍: 慶尙南道 東萊郡 機張面 大羅里 三百五十二番地 住居: 不定 無職 朴光一事, 朴容善 二十八年

 

本籍: 咸鏡南道 咸興郡 咸興面 荷西里 百九十二番地 住居: 同上 無職 都容? 三十七年

 

右權五稷, 金應基, 朴長松, 高四察 對한 治安維持法, 出版法違反, 其他의 者에 對한 各 治安維持法違反(치안유지법위반)으로 起訴된 事實에 대하야 豫審을 遂하야 決定하기 左와 如함.

 

主文

本件을 京城地方法院 公判에 付함.

 

理由

第一, 被告人 金綴洙는 明治 四十五年 東京에 赴하야 靑年學院 及 早稻田大學 政治科 等에 學하고 大正 五年 歸鮮하였는데 夙히 共産主義에 共鳴하야 其 社會 ○○의 階梯로써 朝鮮을 帝國의 羈絆에서 離脫케 할 事를 熱望하고 大正 八年 三月의 朝鮮 ○○ 騷擾 事件 때에 此 實行 運動을 하고저 決意하고 其 目的으로써

 

(一(일)) 大正 十年 五月 陸路 支那에 入하여 天津 北京을 經하여 同年 七, 八月 頃 上海에 到着하야 同地 佛租界 某 支那人 旅館에서

 

李東輝와 會見

 

하고 其 勸誘에 因하야 同地에 本據를 두고 朝鮮을 帝國의 羈絆에서 離脫케 하고 且 여긔에 共産 制度를 實現할 目的으로써 組織되어 大正 十一年 春頃까지 存續한 高麗共産黨이란 結社)에 其情을 知하고 加入한 後 同年 九月 上旬 同 共産黨 幹部 金立의 付託으로 朝鮮內의 ○○ 運動 及 共産 運動에 使用할 金 一萬圓을 携하고 入鮮하여 京城府 本町 旭旅館에서 崔八鏞과 會見하고 同人에게 交付한 後 直히 上海로 歸還하여 上海의 ○○ 政府를 委員制로 改造코저 하야 同地의 同志와 劃策하고 更히 翌 大正 十一年 十一月 中旬 哈爾賓에 赴하여 同 問題에 對하여 同志 間을 狂奔하고 其翌 大正 十二年 一月 中旬 上海에 歸한 後는 當時 右 問題 解決을 爲하여 同地 佛租界에서 開催中인 國民大會에 朝鮮 全羅北道 代表로 同年 五月에 至하기까지 約 五, 六十回에 亘하여 參加 出席)하고 熱心으로 改造論을 主張하였으나 派爭 激烈하여 互相 排濟하고 歸一할 바 모름을 보고 同年 五月 終에 此 運動을 斷念하고 飜하여 朝鮮에서 朝鮮 ○○ 及 共産運動)의 資金을 募集코저 同年 七月 陸路 入鮮하여 全羅北道 金堤郡 金溝面에서 張鉉軾 及 崔鐸과 會見하고 折衝하였으나 不應한 바 되었다 如斯히 多數 共同하여 安寧 秩序를 妨害하였다

 

<현대어 해석>

 

金鐵洙(김철수) : 본적: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 128번지 주거: 부정 무직, 初臺事(초봉사) 39세

 

趙金用(조금용) 본적: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면 금정 105번지 주거: 당시 경성부 중림동 328번지 박종엽방 점원 朝鮮金融組合聯合會今官事(조선금융조합연합회금관사) 32세

 

金炳琡(김병숙) 본적: 전라북도 김제군 김제면 신풍리 421번지, 주거: 부정, 무직, 39세

 

金吉得(김길득) 본적: 경성부 수표정 43번지, 무직, 32세

 

金濟鳳(김제봉) 본적: 함경남도 함흥군 천서면 팔리 65번지, 주거: 동상, 교원, 35세

 

金壽男(김수남) 본적: 경성부 계동 91번지 주거: 동부 서대문정 1정목 61번지 3 무직 金暹事(김섬사) 25세

 

金連培(김연배) 본적: 경성부 신동 삼번지 주거: 同上(동상) 古物商(고물상) 당시 24세

 

張奎晶(장규정) 본적: 경성부 청운동 98번지 주거: 동부 동동 130번지 무직 張壽事(장도사) 27세

 

金完植(김원식) 본적: 경성부 인사동 일정목 3번지 주거: 同上(동상) 印刷工(인쇄공) 29세

 

朴奉吉(박봉길) 본적: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오빈리 주거: 경성부 무교정 4번지 新聞記者(신문기자) 朴漢卿事(박한경사) 29세

 

朱靑松(주청송) 본적: 함경북도 종성군 종성면 동관동 수남리 주거: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대현리 무직 朴成春事(박성춘사) 28세

 

安秉珍(안병진) 본적: 평안북도 신의주부 진사정 7정목 24번지 주거: 동도 신의주부 운정정 이정목 農業(농업) 高俊事(고준사) 30세

 

高成昌(고성창) 본적: 평안북도 신의주부 매지정 6번지 주거: 동도 동부 초음정 14번지 荷車組合勤務係(하차조합 근무계) 高漢秀事(고한수사) 32세

 

權五稷(권오직) 본적: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 가곡리 422번지 주거: 경성부 도화동 85번지 무직 26세

 

李永祚(이영조) 본적: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마애동 241번지 주거: 경상남도 부산부 초량정 2번지 紡績職工(방적직공) 25세

 

金應基(김응기) 본적: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미호동 214번지 주거: 평안남도 평양부 기림리 147의 13 靴下製造職工 (화하제조직공 - 양말 제조공) 32세

 

朴長松(박장송) 본적: 함경북도 온성군 온성면 주원동 537번지 주거: 경기도 인천부 송현리 56번지 무직 朴知成 朴志成事 (박지성 박지성사), 29세

 

蔡奎恒(채규항) 본적: 함경북도 홍원군 보청면 풍동리 235번지 주거: 경성부 견지동 80번지의 5 書籍商 (서적상) 35세

 

高四察(고사찰) 본적: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석성리 532번지 주거: 경성부 도화동 85번지 무직 高明子事 (고명자사), 26세

 

金鶴(김학) 본적: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수성동 229번지 주거: 不定(일정치 않음) 무직 金衡寬事(김형관사), 31세

 

李增林(이증림) 본적: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 하서리 73번지 주거: 同道 同郡 同面 同里(동도 동군 동면 동리) 69번지 土地仲介業(토지중개업) 44세

 

朴容善(박용선) 본적: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대라리 352번지 주거: 不定(일정치 않음) 무직 朴光一事(박광일사), 28세

 

都容(도용)? 본적: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 하서리 192번지 주거: 同上(동상) 무직 37세

 

■ 재판 경과 및 처분

**권오직(右權五稷), 김융기(金融基), 박장송(朴長松), 고사찰(高四察)**에 대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출판법 위반(出版法違反), 기타의 것에 대한 각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실에 대하여 예심(豫審)을 거쳐 다음과 같이 **결정(決定)**함.

 

주문((主文)

본건:을 경성지방법원 공판(公判)에 부함.

 

■ 이유(理由)

제일(第一), 피고인 김철수(金綴洙)는 명치 45년(1912년) 동경(東京)에 가서 청년학원 및 와세다대학 정치과 등에 입학하고, 대정 5년(1916년) 귀국하였는데, 일찍이 **공산주의(共産主義)**에 공명하여 그 사회 ○○의 단계로서 **조선(朝鮮)을 제국(帝國)의 인연에서 이탈(離脫)**케 할 것을 열망하고. 대정8년(1919년) 3월..조선의 00소요사건 때 이를 실행운동을 하고자 결의하고 그 목적으로서

 

(1) 대정 15년(1926년) 5월 육로로 중국에 들어가 천진 북경을 거쳐 같은 해 7, 8월 경 상해에 도착하여 불조계(佛租界, 프랑스 조계지) 내의 중국인 여관에서 **이동휘(李東輝)**와 회견하고

 

이동휘의 권유에 따라 그곳에 본거지를 두고 조선을 제국의 기반에서 이탈시키고 여기에 공산제도(共産制度)를 실현할 목적으로 조직되어 대정 11년(1922년) 봄까지 존속한 고려공산당의 결사 취지를 알고 가입한 후 동년 9월 상순, 공산당 간부 김립(金立)의 부탁으로 조선 내 00운동 및 공산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금 1만 원(金一萬圓)**을 휴대하고 조선에 입국하여 경성부 본정(本町) 소재 여관에서 최팔용(崔八鏞)과 회견하고 자금을 교부함.

곧바로 다시 상해로 귀환하여 상해의 ○○정부(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개조하고자 동지들과 획책하고

이듬해인 대정 11년(1922년) 11월 중순, 하얼빈에 가서 해당 문제에 대하여 동지들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 이듬해인 대정 12년(1923년) 1월 중순 상해로 돌아온 후에는, 당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그곳 프랑스 조계에서 개최 중이던 국민대표회의에 조선 전라북도 대표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5월에 이르기까지 약 50~60회에 걸쳐 참가 및 출석하여 열성적으로 **개조론(改造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파벌 싸움이 격렬하여 서로 배척하고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해 5월 말에 이 운동을 단념하였다.

이후 뜻을 바꾸어 조선 내에서 조선○○ 및 공산주의 운동의 자금을 모금하고자 그해 7월 육로로 국내에 들어왔다.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에서 장현식 및 최탁과 만나 자금 지원을 설득하였으나, 응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와 같이 다수가 공동으로 안녕과 질서를 방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