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豫審決定書 全文 【二】

(二) 大正14年(1925년) 12월 京城府 都染洞에 舊友 朱鍾建을 訪問하고 同人의 勸誘로 同年 四月十七日 同府 黃金町一丁目 中國料理店 雅敍園에서 金在鳳等이 朝鮮을 帝國의 羈絆으로부터 離脫하고 且 共産制度를 實現할 目的으로써 組織한 秘密結社 朝鮮共産黨인 情을 知하고 加入한後 翌大正十五年 二月 同府 仁寺洞 四十二番地 姜達永方에서 同人 及 李準泰、李鳳洙 洪南杓와 會合하여 同共産黨 幹部의 改選을 行하고 被告人 스스로 中央執行委員이 되어 宣傳部員에 就任하고 其後 同年五月中旬頃까지 右 姜達永方 其他 同府內에서 前後 十二回에 亘하여 中央執行委員會를 開催하고 同共産黨 機關의 組織 豫算의 計上 討議 『푸락치』의 設定 『야체이카』의 配屬 黨則의 制定 李太王 國葬時에 宣傳運動 等에 대하여 凝議하고 同 五月中旬 露國 浦鹽에 赴하여 曺奉岩과 會見하고 當時 同人等이 中國 上海에서 設置한 中央執行委員會 海外部의 解體를 行케한後 翌六月 京城에 歸還하여 同年九月 同府 東小門 附近 山中에서 吳義善 元友觀 及 申東?와 會合하여 朝鮮共産黨 中央幹部의 改選을 行하고 被告人 스스로 同黨 責任秘書에 就任한後 同年十二月上旬頃까지 前後 約十回나 右 東小門 附近 山中에서 中央執行委員會를 開催하여 黨員의 獲得 『서울』系 同志의 吸收 等으로 凝議하고 同 十二月六日 同府 天然洞에서 朝鮮共産黨 第二回 大會를 開催하였다 此際 被告는 責任秘書의 地位를 辭退하고 安光泉을 此에 推하고 其他 中央 幹部의 改選을 行한後 同月中旬頃 金剛을 伴하고 京城을 出發하여 浦鹽經由 翌昭和二年二、三月頃 露西亞 莫斯科에 到着하여 第三國際共産黨 中央執行委員會 東洋部에 書面으로서 朝鮮共産黨의 經過 及 幹部 改選의 狀況을 報告하고 同年 五月中旬頃 浦鹽에 돌아갓고 同年 七月에 潛入한 것인데 當時 朝鮮共産黨에서는 責任秘書 安光泉 等이 所謂 엠엘派를 거느리고 派閥을 形成하여 專橫을 極하고 잇섯슴을 被告人은 同黨 第三回 大會를 開催하여 安光泉 等을 驅逐코저 하얏스나 自己가 檢擧되리라는 風聞이 잇슴으로 다시 同年 十月初旬頃 浦鹽에 脫走하얏다

 

(三) 其後 安光泉 等도 檢擧되고 또 昭和二年十二月下旬 京城에서 李英 等에 依하여 組織된 서울派 朝鮮共産黨도 多數 檢擧되어 朝鮮의 共産黨은 事實上 壞滅에 歸하얏슬 뿐 아니라 昭和三年十二月七日 第三國際共産黨 執行委員會 政治書記局으로부터 在來의 朝鮮에 共産黨은 모다 派爭으로 成立한 것이매 此等 全部를 承認치 안흐니 다시 ??誠者 大會를 開催하여 其 決議에 基하여 朝鮮共産黨을 再建設할 것 等 朝鮮共産黨 問題에 對한 決定書의 發表가 잇섯슴으로 翌昭和四年三月 中國吉林省敦化縣香水河子에 赴하여 同地에서 尹滋英、金榮萬 等의 同志와 屢次 會合 協議한 끄테 朝鮮으로 하여금 帝國의 羈絆으로부터 離脫케 하고 또 共産制度를 實現케 할 目的으로 右 決定書의 趣旨대로 新要素上에 朝鮮共産黨을 再建設코저 이를 爲하여 朝鮮內에 朝鮮共産黨 再建設 準備委員會를 設置키로 하고 被告人 等은 海外에 잇서 發起할 趣旨로써 朝鮮共産黨 再建設 準備委員會 發起會를 組織하고 安相勳에게 黨 再建設의 密命을 주어 朝鮮에 潛入케 하고 다시 同年 五月 宋武英에게도 同時에 密命을 주어 入鮮케 하얏더니 同年 六月末頃에 이르러 右 兩名이 共히 檢擧消息을 듯자 翌 七月初旬頃 前同所에 尹滋英、金榮萬、金泳植 及 金圭烈과 會合하여 右 準備委員會 發起會를 準備委員會로 고치고 被告人 等 스스로 朝鮮內에 潛入하여 朝鮮共産黨 再建設의 實行運動을 하고 ???誠者大會를 朝鮮內에서 開催하여 其 決議에 基하여 黨 建設을 할 것을 協議하고 其 結果 被告人은 翌昭和五年 一月 入鮮하여 咸鏡北道 淸津에서 南潤九에게 咸鏡南道 咸興에서 被告人 李增林과 同道 元山에서 朴泰善과 江原道 鐵原에서 朴在龍에게 京畿道 高陽郡 神道面에서 被告人 都容????와 忠淸南道 論山郡 陽村面에서 愼杓晟 翌 二月 全羅北道 扶安郡 白山面에서 裵致文과 慶尙南道 東萊郡 東萊에서 文時煥과 濟州島에서 다시 前顯 朴在龍과 翌 三月 慶尙南道 釜山에서 盧相乾、安相敎、姜弘烈에 各各 會見하고 叙上의 計劃에 贊同을 求하는 等 前記 目的한 事項의 實行에 關하여 協議하얏다

第二、被告人 李增林은 昭和四年十二月五日 新義州地方法院에서 治安維持法違反의 罪로 懲役二年 三年間 刑의 執行猶豫의 言渡를 밧고 其 猶豫期間 中에 잇든 者로 昭和五年一月 前記 被告人 金綴洙의 項(三)에 叙說함과 가티 被告人 金綴洙가 第三國際共産黨 執行委員會 政治書記局의 發表한 朝鮮共産黨을 ??????誠者大會의 決議에 基하여 再建設할 使命을 가지고 滿洲로부터 入鮮、咸鏡南道 咸興郡 咸興面에 잇는 被告人을 尋訪하여 同 計劃에 贊同을 求할 際 被告人은 朝鮮을 帝國의 羈絆으로부터 離脫시키고 且 여기에 共産制度를 實現시킬 目的으로써 金綴洙로부터 右 決定書의 內容을 聽取하고 其 企劃에 贊同을 하여 ??????誠者大會에 參加하고 且 將來 朝鮮共産黨에도 加入할 것이오 또는 萬一 被告人 金綴洙가 檢擧될 때에는 被告人 스스로 同人에 代하여 再組織을 爲하여 盡力하겠다고 答하고 被告人 金綴洙 意中의 同志의 氏名을 聽取하는 等 前記 目的의 人事項의 實行에 關하여 協議를 하얏다

 

第三、被告人 都容??????는 昭和五 年 一月下旬 前記 被告人 金綴洙의 項(三)에 叙說함과 가티 被告人 金綴洙가 第三國際共産黨 執行委員會 政治書記局의 發表한 朝鮮共産黨을 ??????誠者大會의 決議에 基하여 再建設할 使命을 띄고 滿洲로부터 入鮮하여 京畿道 高陽郡 延禧面 延禧專門學校 附近에서 被告人과 會見하고 同所로부터 同郡 神道面 龍頭里인 當時의 被告人 方에 이르는 途中 及 同日 被告人 方에 宿泊할 際 右의 計劃을 傳하여 此에 贊同을 求하자 被告人은 朝鮮을 帝國의 羈絆으로부터 離脫시키고 且 여기에 共産制度를 實現시킬 目的으로써 其 企劃에 贊意를 表하고 且 其 運動에 協力할 旨를 答하는 等 前記 目的의 事項의 實行에 關하여 協議를 하얏다

 

第四 被告人 趙今龍은 大正二年 露西亞 莫斯科의 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入學하여 共産主義의 硏究를 하고 大正十四年 十月 學業을 마치고 歸鮮하야 翌大正十五年 六月上旬頃 京城府 仁寺洞 新興靑年同盟 事務所內에서 全政琯의 勸誘로 前記 金在鳳 等의 組織에 係한 朝鮮共産黨이 上叙 兩個의 目的으로 組織된 結社이줄을 알고 此에 加入하야 全政琯、廉昌烈과 한가지로 京城第九 『야체이카』에 屬하고 同月中 二回에 亘하야 右 事務所에서 『야체이카』會를 開屬하고 同月中二回에 亘하야 右事務所에서 『야체이카』會를 開하고 共産主義의 宣傳及黨員의 獲得에 對하야 協議하는 等 前記 目的을 爲하야 策動하얏다

 

 

<현대어 해석>

(2) 1925년 12월 경성부 도염동에 옛 친구 주종건을 방문하고 그의 권유로 같은 해 4월 17일 경성부 황금정 1정목 중국식당 아서원에서 김재봉 등이 조선을 일본제국의 기반으로부터 이탈하고 공산제도를 실현할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임을 인지하고 가입한 후 다음 해 1926년 2월 경성부 인사동 42번지 강달영 방에서 그와 이준태, 이봉수, 홍남표와 회합하여 공산당 간부를 다시 선출하고 피고인 스스로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선전부원에 취임하고 그 후 같은 해 5월 중순경까지 강달영 방과 기타 경성부내에서 이전 및 이후 12회에 걸쳐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동 공산당기관의 조직 예산의 계상 토의, 『푸락치』의 설정, 『야체이카』의 배속, 당칙의 제정, 순종의 국장 시에 선전운동 등에 대하여 깊이 토의하고 동 5월 중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조봉암과 회견하고 당시 김철수 등이 중국 상해에서 설치한 중앙집행위원회 해외부의 해체를 하게 한 후 다음 달 6월 경성에 귀환하여 동년 9월 경성부 동소문 부근 산중에서 오희선, 원우관 및 신동?와 회합하여 조선공산당 중앙간부의 재 선출을 하고 피고인 스스로 동당 책임비서에 취임한 후 동년 12월 상순경까지 전후 약 10회나 동소문부근 산중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당원의 획득 『서울』계 동지의 흡수 등을 깊이 토의하고 동 12월 6일 경성부 천연동에서 조선공산당 제2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무렵 피고는 책임비서의 지위를 사퇴하고 안광천을 추천하며 기타 중앙 간부를 재 선임한 후 동월 중순경 김강을 동반하고 경성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다음해 1927년 2, 3월경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제3국제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 동양부에 서면으로서 조선공산당의 경과 및 간부 선임의 상황을 보고하고 동년 5월 중순경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갔고 동년 7월에 잠입한 것인데 당시 조선공산당에서는 책임비서 안광천 등이 소위 ML를 거느리고 파벌을 형성하여 전횡이 매우 극열하였으므로 피고인은 동당 제3회 대회를 개최하여 안광천 등을 축출코저 하였으나 자기가 검거되리라는 풍문이 있음으로 다시 동년 10월 초순경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하였다

 

(3) 그 후 안광천 등도 검거되고 또 1927년(소화 2년) 12월 하순 경성에서 이영 등도 다수 검거되어 조선의 공산당은 사실상 괴멸한 상태일 뿐 아니라 1928년 12월 7일 제3국제공산당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으로부터 기존의 조선 공산당은 모두 파쟁으로 성립한 것이매 이들 전부를 승인치 않으니 다시 oo성자대회를 개최하여 그 결의에 따라 조선공산당을 재건설할 것 등 조선공산당문제에 대한 결정서의 발표가 있었으므로 다음해 1929년 3월 중국 길림성 돈화현 향수하자에 가서 현지에서 윤자영, 김영만 등의 동지와 여러 차례 회합 협의한 끝에 조선으로 하여금 제국의 기반으로부터 이탈케 하고 또 공산제도를 실현케 할 목적으로 해당 결정서의 취지대로 새로운 관점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설하고자 이를 위해 조선 내에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설치키로 하고 피고인 등은 해외에 있어서 발기할 취지로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발기회를 조직하고 안상훈에게 당 재건설의 밀명을 주어 조선에 잠입케 하고 또한 동년 5월 송무영에게도 동시에 밀명을 주어 조선에 들어가게 하였더니 동년 6월 말경에 이르러 두 사람 모두 검거 소식을 듣자 7월 초순경 같은 장소에 윤자영, 김영만, 김영식 및 김규열과 회합하여 준비위원회발기회를 준비위원회로 고치고 피고인 등이 스스로 조선 내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의 실행운동을 하고 OOO성자대회를 조선 내에서 개최하여 그 결의에 따라 당 건설 할 것을 협의하고 그 결과 피고인은 1930년 1월 조선에 들어와 함경북도 청진에서 남윤구에게, 함경남도 함흥에서 피고인 이증림과 함경남도 원산에서 박태선과 강원도 철원에서 박재용에게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서 피고인 도용O와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에서 신표성 다음 달 2월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에서 배치문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에서 문시환과 제주도에서 다시 전현, 박재용과 다음 3월 경상남도 부산에서 노상건, 안상교, 강홍렬과 각각 만나고 위에서 설술한 바와 같은 계획에 찬동을 구하는 등 전기 목적한 사항의 실행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제2, 피고인 이증림은 1929년(소화 4년) 12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의 죄로 징역 2년, 3년간 형의 집행유예의 언도를 받고 그 유예기간 중에 있던 자로 1930년 1월 앞에서 기술한 피고인 김철수의 항 (3)에 기술함과 같이 피고인 김철수가 제3국제공산당집행위원회정치서기국dl 발표한 조선공산당을 OOOO성자대회의 결의에 따라 재건설할 사명을 가지고 만주로부터 조선에 들어와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에 있는 피고인을 방문하여 동 계획에 찬동을 구할 때 피고인은 조선을 제국의 기반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이어 여기에 공산제도를 실현시킬 목적으로서 김철수로부터 위 결정서의 내용을 청취하고 그 기획에 찬동을 하여 OOOO성자대회에 참가하고 향 후 조선공산당에도 가입할 것이오 만일 피고인 김철수가 검거될 때에는 피고인 스스로 조선공산당 재조직을 위해 진력하겠다고 답하고 피고인 김철수 의중의 동지의 사람 이름을 청취하는 등 전기 목적인 사항의 실행에 관하여 협의를 하였다.

 

제3, 피고인 도용O은 1930년 1월 하순 전기 피고인 김철수의 항(3)에 서술함과 같이 피고인 김철수가 제3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이 발표한 조산공산당을 OOOOOO성자대회의 결의에 따라 재건설할 사명을 띠고 만주로부터 조선에 들어와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연희전문학교 근처에서 피고인과 회견하고 그곳으로부터 고양군 신도면 용두리 당시의 피고인 방에 이르는 도중 또는 피고인 방에 숙박할 때 본 계획을 전하여 이에 찬동을 구하자 피고인은 조선을 제국의 기반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이어 여기에 공산제도를 실현시킬 목적으로써 그 계획에 찬성의 뜻를 표하고 그 운동에 협력할 지를 답하는 등 전기 목적의 사항 실행에 관하여 협의를 하였다.

 

제4 피고인 조금룡은 1923년(원문 大正 二年은 대정 12년의 오타로 판단됨)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공산주의의 연구를 하고 1925년(大正 十四年) 10월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1926년 6월 상순경 경성부 인사동 신흥청년동맹사무소내에서 전정관의 권유로 김재봉 등의 조직에 이은 조선공산당이 위에서 서술한 2개의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인 줄을 알고 이를 가입하여 전정관, 염창렬과 마찬가지로 경성 제9 『야체이카』에 속하고 동월 중 2회에 걸쳐 동 사무소에서 『야체이카』회를 개최하고 공산주의의 선전 및 당원의 확보에 대하여 협의하는 등 전기 목적을 위해 책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