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 이 명 | 호 : 지운(芝雲, 遲耘), 초봉(初峰), 이명 : 김원백(金元白), 김창수(金昌洙), 김동재(金銅再, 金東宰), 김창률(金昌律), 김창근(金昌根), 김상근(金相根) |
| 출신지 | 전북 부안(扶安) |
| 생몰년월일 | 1893. 5. 25 ~ 1986. 3. 16 |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관련 단체 | 곡귀단, 열지동맹, 신아동맹단, 사회혁명당,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재건설위원회 |
| 관련 사건 | 조선공산당재건설위원회 사건 |
| 포상훈격(연도) | 독립장(2005) |
주요활동
항일비밀결사 열지동맹 결성, 사회혁명당 조직, 고려공산당(상해파) 주요 간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조선공산당재건설위원회 활동
본문
1893년 5월 25일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백산면(白山面) 원천리(元川里)에서 300두락의 농사를 짓는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유학(儒學)을 공부한 서당의 훈장으로 구례 군수를 지낸 서택환(徐宅換)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서택환은 지운(芝雲)이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말년을 가까이 지냈던 허백련 화백은 “나이 들어 늦게 김매 먹고 산다”며 ‘더딜 지(遲)’자와 ‘김맬 운(耘)’, ‘지운(遲耘)’이라 바꿔 말년의 호로 삼았다. 일본 유학시절 친우들은 ‘늘 먼저 나서 선두에 선다’며 ‘초봉(初峰)’이라 불렀고, 김원백(金元白)·김창수(金昌洙)·김동재(金銅再, 金東宰)·김창률(金昌律)·김창근(金昌根)·김상근(金相根)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서당을 끝낸 후 화호보통학교와 군산의 금호학교(金湖學校)에서 공부하고,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했다. 도쿄(東京)의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 발간에도 참여하였으며, 노동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1911년 반역사건으로 처형된 일본 무정부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樹)의 저서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1914년에 “죽은 귀신이 되어서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어야 한다”며 곡귀단(哭鬼團)을 조직하였고, 1915년에는 보다 엄숙한 정치적 비밀결사 열지동맹(裂指同盟)을 결성하였다. 윤현진(尹顯振)·정노식(鄭魯湜)·장덕수(張德秀)·김효석(金孝錫)·김철수(金喆壽)·김익지(金益知) 등과 ‘도원결의(桃園結義)’ 하듯이 함께 목욕하고 손가락을 갈라 피를 합하여 마셨다.
1915년 가을 중국인들과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표로 한 비밀결사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하였다. 이 결사에는 열지동맹에 참가했던 윤현진·정노식·장덕수를 비롯하여 최익준(崔益俊)·하상연(河相衍)·김명식(金明植)·김양수(金良洙) 그리고 중국인으로 황개민(黃介民)(또는 (黃覺))·등결민(鄧潔民)·나활(羅豁) 등과 대만인 팽화영(彭華榮) 등 모두 30여 명이 참여했다.
1920년 가을, 장덕수·최팔용(崔八鏞)·이봉수(李鳳洙)·주종건(朱鍾健)·이증림(李增林)·도용호(都容浩)·김종철(金鍾喆)·최혁(崔爀)·홍도(洪濤)·엄주천(嚴柱天) 등과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을 조직하였다. 일본제국주의를 축출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목적을 가진 비밀결사였다.
사회혁명당은 해외를 왕래했던 당원 홍도와 허헌(許憲)을 통하여 이동휘(李東輝)의 측근인 김립(金立)과 연결되어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 대표 8명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1921년 4월 국내를 떠나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가는 도중에 베이징에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성토문에 서명하였다. 1921년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한인사회당, 사회혁명당 그리고 기타 공산단체, 노동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상하이에서 ‘제3회 한인사회당 대표회’가 개최되었다. 17명으로 구성된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재무담당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립의 지시로 1921년 9월 상순 국내로 들어와 1만원을 상해파 국내간부인 최팔용에게 전달하고 상하이로 귀환하기도 하였다. 1922년 2월 10일 아침 김립이 김구 세력인 오면직(吳冕稙)·노종균(盧鍾均)에 의하여 상하이에서 저격당해 즉사할 당시 김하구(金河球)·유진희(兪鎭熙) 등 고려공산당 간부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김립 암살사건에 분노한 상해파 계열의 ‘모험파’들인 최동욱(崔東旭)·최계립(崔溪立)·이호반(李鎬班)·한광우(韓光宇) 등이 상하이로 와서 복수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지만, “우리의 투쟁대상이 일본제국주의자이지 동족상잔은 절대불가”라며 말렸다.
김립 피살이후 이동휘를 뒤이은 사실상의 상해파 고려공산당 상해파 제2인자로 활약하게 된다. 이동휘·박진순(朴鎭順)·홍도로 구성된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모스크바 파견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당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해파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을 검토한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는 「제3국제공산당 검사위원회 결정(1921. 11. 15)」을 작성하여 고려공산당의 분쟁과 ‘자유시참변(또는 흑하사변)’ 등에 관한 결의를 내렸다. 이에 따라 연합고려공산당 창립 대회를 소집하게 될 8인의 연합중앙간부가 구성된 바, 이동휘·홍도·이봉수와 함께 상해파 측의 연합중앙간부에 선임되었다.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128명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가하여 대회 집행부 간부로 활약하였다. 대회에서 윤자영(尹滋瑛)과 함께 상해파를 대표하여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회가 국제공산당에 의하여 승인되지 않음으로써 연합에 실패하였다.
1923년 1월 중순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전라도대표로 참가하여 개조파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전통을 인정하고 이를 개조해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하자”고 주장했고,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인정한다면 (러시아에서 조직한) 국민의회도 동시에 최고기관이었음을 인정하라”고 주장하였다. 두 주장이 맞서면서 국민대표회의 역시 단일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을 건설하는데 실패하였다. 국민대표회의의 파국이 예상된 1923년 5월말 결국 상하이를 떠나 친우 이규홍(李圭弘)과 항저우(杭州)로 갔다가 7월경 귀국하였는데 해외로 나간 지 약 2년 3개월만의 일이었다. 친우 장현식(張鉉植)을 찾았다가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정탐 최탁에게 걸려들어 붙잡힌 후 거주제한 1년 6월을 받았다.
1925년 봄에 이르러 양대 공산주의운동 세력인 화요파(火曜派)와 서울파는 각각의 세 과시에 나섰다. 독자적인 조선공산당 창건을 도모했던 화요파는 전조선기자대회(4월 15~17일)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4월 20~21일)의 개최를 결정하였고, 이에 맞서 서울파는 4월 5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 전국연합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결국 화요파는 북풍회(北風會),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과 연합하여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조선공산당에는 상해파의 주종건과 유진희가 참가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이동휘 등 상해파 간부들은 당초 화요파의 조선공산당 승인에 부정적이었다. 국제공산당은 조선공산당의 승인문제에 대한 상해파 지도자인 이동휘에게 승인여부를 물었다. 이동휘는 상해파 국내간부들의 의견을 타진하고자 1925년 12월초 박응칠(朴應七)에게 밀서를 주어 국내로 파견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신의주사건(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으로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주종건과 유진희 역시 체포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조선공산당의 위기상황에서 주종건의 연락을 받고 11월 상경한 후 이봉수와 함께 당에 가입했고 중앙간부 후보로 선임되었다. 박응칠을 통해 이동휘에게 보낸 답장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공산당을 살려야 되겠다. 공산주의자라면 파당을 초월해서 당을 지켜야 하겠으니 국제당에 찬성 전보치고 장래일은 이봉수와 나에게 맡겨 달라”, “생명을 내걸고 잘해 보겠다”고 답장하였다. 이에 따라 이동휘는 국제공산당에 찬성 전보를 보냈고, 결국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은 승인되었다.
1926년 2월 강달영(姜達永)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중앙간부진에 선임되어 선전부 위원이 되었다. 이어 3월 15일에 개최된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는 새로운 중앙간부진을 구성하였고 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조선공산당에 참여한 상해파 간부들은 화요파 중심의 조선공산당과 서울청년회측과의 합동을 위한 3차례의 협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서울파의 지도자 김사국(金思國)을 여러 차례 만나 협상을 했으나, “합작조건으로 모든 권리를 자기에게 다 주어야 한다”며 합동을 거부하였다.
1926년 5월 8일 김사국이 사망하자 이봉수와 함께 강달영 등 조선공산당 다수파인 화요파계열 당간부들을 설득하여 김사국의 장례를 사회단체장으로 관철시켰다. 당 조직과 운영에서도 각파연합에 의한 당통일 방침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26년 6월 만세운동으로 당 간부들인 강달영·김남수(金南洙)·이봉수·이준태(李準泰) 등이 붙잡혔고 홍남표(洪南杓)와 구연흠(具然欽) 등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1926년 6월초부터 7월말에 걸쳐 이른바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의 결과 당 중앙에 혼자 남게 된 상황에서 체포 직전의 강달영으로부터 책임비서직을 넘겨받았다. 1926년 9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어 당을 재정비하였다. 도쿄에서 귀국한 일월회 회원들과 서울청년회측 인물들을 당에 끌어들이고자 노력하였다. 일월회 핵심인물인 안광천(安光泉)에 이어 엠엘ML그룹의 리더 양명(梁明)이 입당하였다. 안광천과 양명은 중앙간부가 되었으며, 이어 서울파의 김준연(金俊淵)과 권태석(權泰錫)도 입당하였다. 1926년 12월 6일 서울 아현동에서 2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하는 이른바 ‘통일공산당’의 정식 중안간부를 선출하였다. 당대회 이전까지 임시책임비서로서 14차례의 중앙간부회를 이끌었고 국제공산당 경성 주재원을 통해 16회에 걸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대회의 결의에 따라 당대표로서 공청(共靑)대표 겸 통역으로 김강(金剛)을 대동하고 1926년 12월 중순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다음해 2월말에서 3월초 사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화요파 김단야(金丹冶)의 거짓 통역과 조동호(趙東祜)의 집요한 반대활동을 극복하며 국제공산당의 당 승인을 받아냈다. 1927년 5월 모스크바에 동행했던 김영만(金榮萬)·윤자영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고 7월 김영만과 함께 국내로 귀국하였다.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고 귀국했으나 ‘당중당’인 엠엘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안광천을 비롯하여, 양명·김준연, 그리고 공청책임자로서 모스크바에 먼저 파견되었던 고광수(高光洙) 등이 엠엘파 소속이었다. 엠엘파는 일월회, 서울청년회 신파, 재만주공청이 연합된 세력으로 ‘파벌박멸’을 내세웠지만 새로운 파벌을 구축한 셈이었다. 새로운 파벌의 존재와 함께 많은 스파이들이 당에 침투해 있었다. 엠엘파로부터 파쟁분자라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엠엘파의 협박과 체포의 위험을 피해 1927년 10월 국내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이후 서울파와 상해파의 합동세력은 1927년 12월 21일 당대회를 열고 별도의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국제공산당 파견대표로 김영만을, 주외대표(駐外代表)로 이동휘를 각각 선임하였다. 서울상해파 조선공산당 대표 김영만과 모스크바로 가서 1928년 2월말 국제공산당 정치서기국에 자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엠엘당이 비합법적인 ‘당중당’을 만들어 당을 당 대중으로부터 소외시켜 당의 위기와 분열을 초래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들 서울상해파 조선공산당의 외교 노력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국제공산당은 1928년 2월 27~28일에 개최된 당대회에서 재조직된 엠엘당을 두둔하였고, 이들을 원동으로 추방하였다. 이동휘와 김규열(金圭烈)이 재차 국제공산당 제6차 대회에 파견되어 엠엘당 부인과 서울상해파 당대회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서울상해파, 화요파, 엠엘파 각 대표들이 모스크바에서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지만, 결국 1928년 「12월테제」에 의하여 조선공산당은 해소되었으며 당 재건 결정이 내려졌다. 서울상해파의 대표로 모스크바에 갔던 이동휘와 김규열이 1928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서 「12월테제」와 국제공산당의 입장을 설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윤자영·김영만·이운혁(李雲赫) 등과 회합을 갖고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3월 하순 윤자영·김영만 등과 함께 만주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으로 가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1월 국내에 잠입하여 청진, 함흥, 원산, 철원을 거쳐 서울에서 동지들을 만났고, 부산과 제주를 거쳐 양산(梁山)에 갔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전주경찰서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제1심 재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김병로와 이인 두 변호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우리가 포로이지 저들의 법률을 시인하고 들어갈 것이 아니라”며 항소하지 않았다.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시달렸다. 옥중 투쟁에 빠지지 않았던 탓에 사상범으로서 혹독한 처우를 받았다. 친구들의 노력으로 병감(病監)으로 옮겨졌으나 망가질 대로 망가져 생명이 위독하여 장녀 김금남이 날마다 ‘송장을 찾아가려고’ 대기하기도 했다. 경성형무소에서 김동삼(金東三)과 교류하며 동지애를 나누었다.
경성형무소에서 처우개선 투쟁이 일어나 간수들이 사상범 4명을 고문 기구로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항의하여 1,200명 가운데 1,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소리를 지르고 만세를 부르며 기물을 파괴하는 등 형무소 당국에 항의하였다. 이 일로 밤낮으로 팔을 등 뒤로하고 수갑이 채워진 채 무릎을 꿇고 지냈고, 한때는 벽에 고개를 쳐 박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일도 있었다. 김동삼과 함께 형무소 측과 협상하였고, 결국 고문했던 계호계(戒護係) 소속 간수 8명이 징역에 처해졌다. 이 사건 후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간도 5.30사건’ 주도자인 김근(金槿) 등 10여 명의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8년 8개월만인 1938년 10월 28일 대전형무소에서 풀려났다.
1940년 여름 또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신설된 예방구금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함흥경찰부에서 대전형무소 출옥자들이 태평양전쟁과 관련하여 ‘비밀음모’를 했다고 하여 10여 명을 다시 체포, 고문하여 유죄판결을 내렸다. ‘공산당재건계획’사건으로도 알려진 이 사건에 당시 대전형무소의 간수였던 이홍래(李弘來)가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홍래는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의 ‘옥중동지’들이 주고받던 편지를 전달해주던 사람이었는데 고문으로 사망했다. 대전형무소에 있던 김근, 강진(姜進) 등은 이 사건으로 형량이 추가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으로 끌려가 징역 4년을 받았고,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5년 8월 17일 풀려난 직후 서울로 올라오다 조치원에서 일행과 헤어져 고향인 부안으로 내려갔다. 석방 당시 일제의 지독한 고문으로 자기 발로 버스에 오르지도 못할 정도였다. 20여 일 후 대전형무소 시절의 동지였던 ‘간도5.30사건’의 주도자 김근과 김현수(金玹洙)가 찾아와 상경을 종용하자 이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자신을 중심으로 공산당을 조직하자는 동지들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영 등 일제강점기 서울상해파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장안파(長安派)의 당 조직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상경 얼마 후 박헌영(朴憲永)의 재건파 조선공산당 가입을 선언하고 박헌영과 면담하였다. “미군점령하이니 미군과의 충돌을 피해가면서 우리의 조직과 선전을 공개적으로 해야 하며 민족주의자들과 온화하게 접촉을 잘해서 통일정부를 빨리 세우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박헌영 등 재건파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1945년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과 중앙인민위원회를 급조해 발표하였다. 이때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그리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체신부장 대리에 선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가 미군정에 의하여 부인되었다.
1945년 10월 25일 이승만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할 때 독촉중앙위원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 7명에 포함되어 공산당을 대표하였다. 하지만 이승만과 박헌영은 1945년 12월에 이르러 공개적으로 상호 비난함으로써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46년 여름에 이르러 조선공산당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개편하는 문제가 대두되면서 당의 분열이 공개적으로 표면화되었다.
결국 1946년 8월 8일 반 박헌영파인 이정윤(李廷允)이 당에서 제명되었고, 무기정권 처분을 받았다. 그 해 여름, 인민당의 여운형(呂運亨), 신민당의 백남운(白南雲)과 연락을 갖고 사회노동당 결성에 나섰다. 공산당의 대회파, 인민당의 31파, 신민당의 반간부파가 1946년 10월 16일 대회를 열고 사회노동당 결성을 선포했으나 ‘뭔가 잘못 되고 있다’고 판단에서 이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1947년 2월 27일 사로당 대의원대회에서 해체결의가 나왔다. 이후에는 일체의 정치적 활동을 중단하고 낙향하여 칩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반병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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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독립기념관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 searchWord =&reSearchWord=&index=&id=3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