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金錣洙, 1893~1986) 선생의 자녀는 3남 2녀이다. 금남(錦男), 용선(容善), 용일(容日), 용화(容華), 용덕(容德)이다. 큰 딸인 금남(1911~1954)은 2019년에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광주학생운동과 관련된 서울 근화여학교 학생운동의 대표적 인물이 김금남이다. 국가유공자 중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유공자가 된 경우는 종종 눈에 띄지만 아버지와 딸이 함께 유공자가 되는 경우는 드문데, 김철수와 딸 금남이 유공자로 이름을 올렸다.
광주학생운동과 김금남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동조하는 운동이 서울에서도 일어났는데, 1929년 12월 9일에 각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 행렬이 뒤를 이었다. 10일에는 휘문, 숙명여고보, 근화여학교, 협성실업, 청년학관, 배재고보 등이 만세를 부르고 통곡을 한 후 동맹휴학을 하였다(『동아일보』, 1929.12.28.). 1930년 1월에 서울에서 20여 개교에 달하는 각급 여학교와 남학교의 연합시위운동이 추진되었다.
김금남은 근화여학교 고등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930년 1월 14일 같은 학교 학생인 김순례(金順禮) 등과 함께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했다. 이들은 근화여학교를 대표하여 남녀 각 학교 학생 대표들과 시위운동 방안을 협의했다. 1월 15일 각 학교가 일제히 종로 네거리에 집결한 후 연합시위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안국동에 있는 근화여학교 고등과 학생들 260명은 1월 15일 약속된 시간에 교외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의 저지로 실패하자 학생들은 교실 유리창을 파괴하며 교내에서 격렬한 시위를 지속했다. 이 연합시위운동 과정에서 각 학교에서 50여 명의 여학생이 검거되었다. 근화여학교에서 구속된 사람은 6인으로, 김금남·김귀인복·전연봉·이충신·최성반·김순례이다. 김금남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동아일보』, 1.25). 그녀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24일간 구류된 후 기소 유예되었으며 학교에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일본의 명치대 정치경제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해방 후 사회운동
1933에 김제군 성덕면 사람 박판철(朴判鐵)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아버지 김철수 선생이 권해서 한 결혼이었다. 3남 2녀를 낳았다. 남편은 좌익운동가로 여순사건 관련으로 잡혀 총살되었다. 김금남도 검거를 피해 다니다 얻은 지병으로 1954년에 사망하였다(『한겨레신문』, 1989.1.24.). 금남은 유명을 달리하기 전에 자녀들을 여동생 용화에게 맡겼다. 김용화는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용화는 1961년부터 계화면 돈지에서 삼성약방을 운영하며 조카들을 친 자녀처럼 키웠다. 하지만 금남의 자녀들은 연좌제에 묶여 직장을 갖기에도 어려움을 겪으며 고단한 삶을 살았다. 남북분단으로 체제경쟁 속에서 ‘공산주의자의 자손’이라는 낙인이 찍힌 후손들은 오랜 세월 취업과 유학 등에서 차별이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유공자가 되다
김금남은 아버지 김철수의 굳건한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학창 시절부터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여학생의 몸으로 당당히 연합시위를 이끌며 민족의 자존을 지켰다. 해방 후에는 현대사의 이념 대립 속에서 조국의 분단과 가족의 이별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감내해야 했다.
김금남은 2019년에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지만, 후손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세월을 보냈다. 이런 사례는 많은데, 국가보훈부에서 가족을 찾지 못한 훈·포장만 7,200 여 사례가 있다. 정부 차원에서 독립유공자를 찾아 유공자로 지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수반되어야 할 과정은 가족을 찾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행정력을 동원한다면 후손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김금남의 후손들은 5년 뒤인 2024년에야 어머니가 유공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보훈부를 찾아가서 후손임을 증명한 후에 유공자 증서를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