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유학과 초기 비밀결사 운동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신학문을 접한 김철수 선생은 화호보통학교와 군산 금호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유학 시절 선생은 매사에 성품이 강직하고 분명하여 일본 학생들과도 치열한 논쟁을 자주 벌였으며, 수많은 유학생이 그를 신망하고 따랐다.
하루는 일본에 있는 조선청년회에서 일본의 저명한 문사인 미야케 세쯔레이(三宅雪嶺)를 초청하여 시국 강연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미야케가 강연 도중 "영국과 아일랜드가 합병하여 사이좋은 형제국이 되었듯이 일본과 조선도 그와 같은 사이"라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자, 맨 앞 좌석에서 듣고 있던 선생은 격분하여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선생은 "이것은 강연이 아니요 이런 강연은 들을 필요가 없으니 내려가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강사를 단상 아래로 떠밀어 내렸다. 당시 온건파 지식인이었던 최남선이 끝까지 들어보자고 제안했으나 선생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장내는 연사를 야유하는 소리와 선생을 연호하는 박수 소리로 뒤덮였다. 유학생들은 이처럼 늘 앞장서서 거침없이 행동하는 선생을 보고 '앞장서서 일한다'는 뜻을 담아 '초봉(初峰)'이라는 호를 붙여주었다.
조국 해방을 향한 선생의 결연한 의지는 곧 구체적인 항일 비밀결사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1914년, 선생은 뜻을 함께하는 친구 7명과 함께 '곡귀단(哭鬼團)'을 결성했다. 여기에는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더라도 귀신이 되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울자"는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이어 1915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열지동맹(裂指同盟)'을 결성했다. 이들은 장래 사방으로 흩어지더라도 어느 곳에서든 서로 연락망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굳게 결의했다. 또한 1916년에는 한국, 중국, 대만, 베트남 출신 유학생 30여 명과 함께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였다. 동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국제적인 반제국주의 연대 투쟁에 나선 것이다.
2. 사회주의 활동의 시작
일제의 가혹한 수탈 아래 신음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며 새로운 독립의 길을 모색하던 김철수 선생은, 민족 해방 투쟁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기 위해 1920년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에 도착한 선생은 최린의 집에서 최팔용, 이봉수, 주종건, 최혁, 장덕수 등과 회동하여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 운동 단체인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을 조직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므로 먼저 민족주의 진영과 손을 잡고 전선을 구축한 뒤, 이후 힘을 길러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다는 단계적 투쟁 노선에 따른 결사였다.
이듬해인 1921년, 선생은 활동 무대를 상해로 옮겨 본격적인 국제 연대 투쟁에 나섰다. 사회혁명당은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계열의 한인사회당과 조직적 결합을 이루어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상해파)'을 창립했으며, 선생은 1923년 초까지 국내외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전반에서 주도했다.
선생이 이처럼 사회주의 사상을 독립운동의 강력한 도구이자 방편으로 수용하게 된 데에는 천성적인 성품과 가정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선생은 천성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특히 어린이나 어려운 이들을 지극히 보살폈던 집안 고모의 행동을 보며 자랐다. 이러한 약자 구제의 성향이 식민지 지식인이라는 엄혹한 현실과 맞물리면서, 민족의 해방과 가난한 자들의 계급 해방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구체적인 행동주의 사상으로 발현된 것이다.
상해를 중심으로 대륙을 누비며 거물급 정치가로 성장한 선생은 이 시기 넓은 스펙트럼의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는 과정에서는 진독수, 황각뿐만 아니라 모택동, 구추백, 이립삼 등 중국 혁명의 핵심 지도자들과 긴밀히 교류했다. 특히 모택동과는 나이가 같다는 사실 덕분에 더욱 깊은 친밀감을 가졌으며, 훗날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고한 뜻을 기리는 추모시를 지어 기리기도 했다. 또한 선생은 인간관계에 있어 사상보다 도덕성과 양심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한 번 인연을 맺으면 비록 노선을 달리하더라도 교우관계를 굳건히 지속했는데, 우파 민족주의 진영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장덕수와 평생토록 변함없는 신뢰를 바탕으로 소통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 오직 '민족과 의리'를 중심에 두었던 선생의 포용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3. 분열을 막기 위한 통합 운동
1920년대 초·중반, 해외 독립운동 진영은 사상과 노선 차이로 인한 극심한 분열과 대립이라는 거대한 시련에 직면해 있었다. 선생이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상해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시기, 임시정부의 일부 세력에 의해 동지인 김립(金立)이 피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내에서는 피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격앙된 목소리가 높았으나, 김철수 선생은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어떤 이유로도 보복을 위한 살상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해외에서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살상하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역량을 스스로 훼손하는 잘못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선생은 우리가 싸워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오직 '일본 제국주의'뿐임을 명확히 하며 대승적 차원에서 동지들을 진정시키고 내분을 수습했다.
독립운동 진영의 연대를 위한 선생의 헌신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해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은 러시아 혁명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던 민족주의 성향의 상해파와 국제공산주의 노선을 따르던 이르쿠츠크파(Irkutsk)의 대립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선생은 목숨을 걸고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을 넘나들며 상해파의 대표로서 치타(Chita) 회의에 참석해 양파의 연합을 끈질기게 시도했다. 비록 완고한 입장 차이로 인해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었으나, 통합을 향한 선생의 의지는 확고했다. 이 과정에서 북경 수비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900리가 넘는 길을 걷고 밀림을 헤쳐 나가야 했으며, 뼛속까지 파고드는 만주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는 등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온몸으로 감내했다.
또한 해외 운동가들의 마지막 희망은 국내외 항일 단체들을 총망라하여 독립운동의 일원화된 방략을 제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새롭게 개조하는 것이었다.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접경 및 만주 등지에서는 무장 독립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나, 임시정부가 본거지를 멀리 떨어진 상하이에 두고 외교 독립 노선만을 표방한 탓에 무장 투쟁 세력까지 포용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선생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국내 개조파 대표라는 중책을 맡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회의마저 각 조직의 첨예한 의견 대립으로 무산되면서, 선생은 조국의 통일과 독립운동의 하나됨을 향한 길고도 험난한 여정을 묵묵히 이어가게 된다.
4. 조선공산당 책임자가 되다
1925년 4월 국내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창립된 후, 11월에 신의주사건으로 주요 간부 및 당원들이 대거 검거되어 당이 무너질 위기에 봉착하자 김철수 선생과 그의 오랜 동지인 이봉수는 입당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당의 수습을 위해 조직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전면에 나섰다.
이 시기 선생이 이끈 지도부는 두 가지 핵심적인 사업 목표를 제시했다. 첫째는 민족주의 진영과 연대하여 강력한 '민족협동전선'을 결성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극심한 갈등 관계에 있던 서울청년회파와 북풍회를 당내로 포용하는 것이었다. 당 내부에서는 파벌이 없고 포용력이 넓은 김철수 선생이야말로 이 까다로운 통합 과업을 수행할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뛰어난 정략과 동지애를 보여주었다. 당시 서울청년회파와 공산당의 맹장이었던 김사국은 화요파와 상해파 모두가 기피하던 인물이었으나, 그가 사망하자 선생은 그의 장례를 400여 개 단체가 참여하는 대규모 '사회장'으로 주도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치러진 이 역사적인 장례식은 일제 경찰마저 경악하게 만들었으며, 분열되어 있던 사회주의 운동 진영이 통일과 단결의 의지를 대내외에 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엄혹한 운동 과정에서도 동지들을 향한 따뜻한 배려와 인간애를 잃지 않았다. 군산에서 서울로 가던 중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환승하는 짧은 시간 동안, 선생은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단칸방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다는 임혁근의 소식을 듣고 담요를 챙겨 달려갔다. 마루조차 없는 토방 집에서 선생을 맞이한 것은 젊은 나이에 맨발로 홑옷만 걸친 임혁근의 부인이었다. 선생은 서울로 갈 기차 차비만 겨우 남긴 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가진 돈을 부인의 손에 얼른 쥐어준 뒤 뒤돌아 뛰어 나왔다. 선생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때를 떠올리면 늘 마음이 슬프다며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이후 6·10 만세운동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다시 한번 와해되는 치명상을 입자, 선생은 무너진 조직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최고 책임자인 '책임비서'로 취임했다. 후대나 일제 경찰은 대규모 검거가 있을 때마다 이를 자기들의 편의상 1차, 2차, 3차 조선공산당으로 구분 짓곤 했다. 이에 따라 선생이 이끈 조직을 '제3차 조선공산당'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일제가 조선공산당원들을 검거할 때마다 임의로 붙인 명칭에 불과하므로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일제의 가혹한 발본색원 작전 속에서도 잔류 당원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당의 맥박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철수 선생이 복원해 낸 조직은 별개의 파편화된 정당이 아니라, 1925년 4월에 창립된 '조선공산당' 자체의 정통성을 온전히 계승한 것이었다.
5. 모스크바 파견과 가혹한 투옥 생활
1926년 12월 6일, 김철수 선생의 주도로 서대문형무소 인근에서 제2차 당대회가 비밀리에 개최되었다. 16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 신임 중앙위원회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 파견할 당 대표로 김철수 선생을 선임했다. 선생은 같은 해 12월 16일 서울을 떠나 코민테른 본부가 있는 모스크바로 향했다. 국내에서 치러진 제2차 당대회가 적법하게 소집되었으며, 여기서 선임된 새 중앙위원회가 조선 혁명운동의 유일한 최고 지도부임을 국제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중책을 맡은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조선 문제를 전담하는 조선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실제 현지 실상을 모르는 코민테른 동양 담당 관료들이 대표성 없는 일부 망명자들의 왜곡된 정보에 의존하고 있어 혼선이 극심했다. 선생은 엄혹한 난관을 뚫고 정통성을 설득한 끝에, 마침내 1927년 4월 29일 '조선문제결정서'를 공식 승인받았다. 이로써 국내에서 개최된 2차 당대회와 김철수 선생을 비롯한 중앙 간부들의 정통성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으며, 해외 망명자들이 국내 조선공산당을 직접 지배하려는 전횡 또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선생의 외교적 헌신이 전면적인 승리를 거둔 순간이었다. 선생은 훗날 이때의 심정을 "모스크바에서 당 승인을 받아내어 속으로 참 좋았다.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승인의 기쁨도 잠시, 국내 ML파의 파당성과 전횡이 알려지면서 선생은 당을 해체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다시 한번 일제에 맞설 강력한 전위 조직을 구축하는 데 헌신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선생은 1930년 전격 검거되어 치안유지법상 최고형인 징역 10년 형을 언도받았다. 항소하여 형을 줄이자는 변호사의 강력한 권유가 있었으나, 선생은 제국주의 일본의 법률과 재판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그로 인해 선생은 조선에서 가장 열악하기로 악명 높았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참혹한 독방 생활과 가혹한 고문을 견뎌냈다. 고문으로 정신을 잃고 실신하기를 반복했으며, 목욕 도중 졸도하거나 극심한 위경련을 일으켜 사경을 헤매는 등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민족 독립을 향한 선생의 신념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경성형무소(마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는 간수에게 간청해 얻어낸 국화 화분 하나를 독방에 두고 위안을 삼았다. 마침 그곳에서 고초를 겪고 있던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을 만나게 되자, 선생은 "멀리 동쪽에 달이 떠다니니 꽃과 달, 그리고 마음도 희다"라는 시를 지어 전했다. 이에 김동삼 선생은 도연명의 시를 인용하여 "국화는 동쪽 울타리의 달빛에 비추어야 제 의미를 갖는데,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할 우리가 왜 이 차디찬 감옥에 갇혀 있는가"라는 탄식과 결의가 담긴 화답시를 보내며 옥중에서 뜨겁게 교감했다.
8년 8개월의 대형(大刑)을 살고 잠시 출소했던 선생은, 1940년 여름 일제가 항일 운동가들을 사회와 격리하기 위해 시행한 '예방구금' 조치에 의해 다시 투옥되었다. 결국 선생은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차디찬 감옥에서 청춘을 모두 보내야 했다. 감옥에 갇혀 있던 1943년, 첫 손녀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가족 면회를 통해 전해 들은 선생은 뛸 듯이 기뻤으나 사랑하는 손녀를 안아줄 수 없었다. 선생은 일제가 물러가고 마침내 이 땅에 해방과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을 담아, 손녀에게 '평화가 찾아오다'라는 뜻의 '화래(和來)'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어두운 감옥 안에서 독립의 서광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