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철수의 가족과 고향 사람들

 

지운(遲耘) 김철수(金鍛洙) 선생은 1893년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다. 동진강 수로가 닿는 이곳에서 쌀 위탁 판매업을 하던 넉넉한 소지주였던 부친 김영구는 재능 있는 아들의 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쏟았다.

깨어 있는 지주였던 아버지를 비롯한 선생의 가족과 마을 주민들은 3·1운동 이후 1920년대 부안 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축을 이루었다. 김영구는 1921년 7월,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아동과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집(김철수 선생의 생가)에서 '노동야학회'를 설립하며 계몽 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이 야학회는 여성 교육을 선도하기 위해 여자부를 신설하는 등 점차 본격적인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어갔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한 계몽에 그치지 않고 민중의 권리 투쟁으로 확장되었다.

1925년에는 부덕한 지주들에게 대항하고자 '원천리 소작 동호회'를 조직하였고, 매월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여 민중에게 계급의식과 경제지식을 보급하였다. 아울러 대외적인 노동연맹 가입과 청년운동 지원을 결의하며 연대 활동을 넓혀나갔다.

1926년에는 민중의 의식을 깨우기 위한 기관으로서 소작 동호회 회관 내에 '삼각독서회'를 창립하고 신문과 책을 구입해 회원들에게 읽혔다. 당시 삼각독서회는 조재면(해방 후 제헌국회의원)이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김철수 선생의 동생인 김복수를 비롯해 김해순, 서필석, 최종규, 조재술, 김봉수 등이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아울러 조재면과 김복수는 '백산청년회'를 조직하여 전북청년연맹과의 연대를 도모하였다. 이렇듯 백산면의 청년 주도 조직들은 지역 내 문제 해결에 안주하지 않고, 상위 조직 및 타 지역 노동 운동과의 긴밀한 연대 속에서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며 부안 지역의 사회운동을 선도하였다.

  

2. 민족의식에 눈을 뜨다

 

이러한 가정 환경과 부친의 교육 열정 속에서 자란 김철수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민족의식을 형성해 나갔다. 당시 고부면 말목(현재 정읍시 이평면 행정복지센터 앞 광장 일대)에는 구례 군수를 지내다 사직한 서택환 선생이 서당을 열고 있었다. 김철수 선생은 이 서당에 다니며 한국의 선비 정신을 배우고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서택환 선생은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하기 2~3년 전부터 제자들에게 "나라가 망해가고 있으니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엄히 가르쳤다. 선생은 훗날 자신이 "서택환 선생의 가르침 덕분에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다"고 자주 회고하곤 했다. 이러한 배경은 유학에 조예가 깊은 지식인이자, 독립운동을 위해 전통 유학과 사회주의를 결합해 나간 한국 사회주의 사상가로서의 독창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18세 되던 해, 선생은 아버지를 대신해 방문한 정읍에서 한일 병합을 기념하는 떡을 멋모르고 먹었다가, 그 사실을 알고는 모두 토해내려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승산을 바라보던 선생은 이 좋은 산천이 일제에 넘어간 것은 서로 싸우기만 하는 파당(派黨) 때문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때의 슬픔을 가슴에 새기며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내 사람이나 내 당파는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